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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책

《안 느끼한 산문집》 - 강이슬 [웨일북]

by Sibnt 2020. 1. 10.

《안 느끼한 산문집》 - 강이슬 [웨일북]

카페에서 이 책을 읽다가 “푸학!”하고 웃음이 터졌던, 궁금해하던 카페 사장님께 추천까지 하게 된 에피소드 이야기를 보고서 나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에피소드 주인공의 글을 읽어봤기에 신뢰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펼쳤다. 첫 에피소드가 ‘혼란의 여름, 성인방송 작가’였다.

이런 에피소드를 민망해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여전히 ‘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색하고 쑥스럽다. 읽고 재미가 있으면 교회에 두려고 했었는데, 괜히 산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일단 읽었다.

왜 “푸학!”하고 웃음이 터졌는지 알 것 같았다. 경험이 재미있는 것인지,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인지, 에피소드들이 대부분 재미있었다. 공감도 되었다. 가끔 뭉클해져서 그 페이지에 머무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지점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지점에서는 행복하고도 아팠던 시간을 떠올렸다. 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젊은 청춘의 삶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솔직하게, 순수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자신의 삶을 잘 표현한 글을 읽었다.

 


* 책 속 문장

루와 헤어진 후 나의 하루는 240시간으로 늘었다. 단 한 번도 나를 루로 꽉 채운 적이 없는데 루 하나가 빠져나간 나는 텅 빈 벌판이었다. 주어진 거라곤 무한대의 시간뿐인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누워 무엇을 해도 도 절대 줄지 않는 시간을 쓰는 기분으로 한참을 살아야 했다. -p.26, 상실의 순기능

아무리 많은 걸 손에 쥐고 있어도, 사랑하고 있지 않아서 나는 자주 공허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 하나만 할 때는 가슴이 벅차 힘들 정도였는데 이제는 나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p.28, 상실의 순기능

가난한 자들은 노력으로 보증금을 모을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보증금이 안 모여서 가난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건지, 이제는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p.41, 보증금, 너에게 청춘을 바친다

엄마는, 첫아이의 성치 못한 눈을 매일 바라보며 죄지은 사람의 얼굴을 했던 엄마는, 아침마다 강판에 사과를 갈며 중얼중얼 혼잣말로 기도하던 엄마는, 어린아이의 악력에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서 의사들의 숱한 한숨 소리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엄마는, 우리 엄마는 그때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다.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에 해낸 거라곤 겨우 사과 맛을 안 것뿐이었다. -p.94, 엄마는 매일 아침 사과를 갈았다

알폰소에게는 ‘바보’, 페드로에게는 ‘호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기에 바보는 ‘바다의 보물’이고 호구는 ‘좋은 구름’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 이어 둘이서 꽤 열심히 스페인어로 의논하더니 내 이름을 정해주었다. 무녜코 데 바로. ‘흙으로 빚은 인형’이라는 뜻이랬다. 왜 흙이냐는 내 질문에 그들은 흙만큼 신성한 건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순간 얘네의 이름을 호영이랑 용찬이로 바꿔줄까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녜코 데 바로는 ‘똥’이라는 뜻이었다. -p.115, 바보와 호구와 무녜코 데 바로

사랑하는 강아지 기쁨이가 죽던 날의 기억…. -p.136-142, 네가 남긴 작은 발자국들도 곧 사라질 텐데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올려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1,000만 원 올리는 것쯤이야’ 하는 가벼운 집주인의 말투가 귓속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p.152, 가난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면

아, 내년에는 또 집값이 오르려나. 우리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똑같은 내년을 맞이하려나. 답답하고 속이상해서 담배를 한 대 태우는 동안 가난을 팔아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차고 넘치게 품은 이 가난을 싼값에라도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p.158, 가난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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