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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책

고등학생 A의 기록들,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 - 노정석 [정미소]

by Sibnt 2019. 10. 2.

《삼파장 형광등 아래서》 - 노정석 [정미소]

신뢰하는 작가님이 낸 출판사의 첫 책이라는 사실과 신뢰하는 책방 대표님이 강력히 추천한 책이라는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획의 말에 이 책에 대해 요약한 문장이 있었다.

이 책은 고등학생이 담아낸 일상의 기록이고, 나아가 교육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그가 고등학교 현장에서 길어 올린 나름의 교육론이다. -p.6, 기획의 말-노정석 작가를 당신에게 보내며

먼저 눈에 띈 단어는 ‘고등학생’. 그렇다. 이 책은 고등학생이 쓴 책이었다. 어느 고등학생의 일상이 담겨있는 책이고 교육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선입견을 품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글에 담긴 생각의 깊이, 배려의 언어, 어떤 단단함 등을 보며 ‘고등학생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깨끗하게 지울 수 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멋진 작가로 바라보며 그의 글을 읽어나갔다.

책을 읽으며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교육에 대해 큰 관심 없이 그저 요구하는 대로 따라갔던 시절이었다.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그 시절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시절에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고, 글로 표현하는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웠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조금 더 괜찮은 어른으로 자랐을까. 더 시간이 흘러 학부모나 교사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되거나, 혹시 어떤 역할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둬야겠다.

 


* 책 속 밑줄

출간을 위한 원고 교정을 보면서도 “(이 교과서는) 급조한 티가 난다.”라는 문장을 삭제하자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책을 만드신 분들께 상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하는 답이 돌아왔다. -p.8, 기획의 말-노정석 작가를 당신에게 보내며

때로는 원망스러운 부모님들이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이듯이, 학생은 학생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요.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좋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보다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처럼 슬픔도 쉽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아주 힘들게 알았으니까요. -p.13, 프롤로그-학생이기 이전에 사람인 우리가 되기를

행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의 심리는 마치 비눗방울과 같다. 크게 불면 불수록 주위의 기대와 관심은 뜨거워지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가장 작은 충격에도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허영에서 비롯되는 만족감이 아니라, 온전히 느끼는 행복이다. -p.22, 사람을 사랑하는 교육-《에밀》 독후 에세이

요즘에는 가끔 절벽으로 달려가는 느낌이 든다. 절망적이라는 게 아니라, 무엇이 되었건 이 땅이 끝나는 지점에서 뛰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허공이 땅을 대신하면, 그때부터는 내가 가진 게 무엇이든지 날려고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밑으로 떨어지든지, 아니면 위로 날아가든지. 내 비행기는 지금이 아니면 만들 수 없겠구나. 사실 이제까지의 학교는 내 탈것을 만드는 과정이었구나. -p.32, 고등학생의 비행 준비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다. 지금까지 수업한 분위기로 미루어볼 때, 아마도 내가 받은 통합 국어, 자연 통합 수학, 심화 영어 등의 교과서는 수능 이전까지 사물함에서 먼지만 쌓일 게 분명하다. 이유인즉슨, 해당 교과서로 수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p.36, 시간표를 점령한 통합 과목

성격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지 가늠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p.41, 소심한 나와 너를 위하여

그렇다면 왜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림뿐만이 아니라. 수영, 모르는 사람에게 길 묻기,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외에 수없이 많은,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언젠가부터 내 곁을 떠났다. ‘잘할 수 없어서’는, 점점 ‘할 수 없어서’가 되어버렸다. -p.59, 그냥, 그린다.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경험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모여서 내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보고 듣는 것과 행동을 자연히 조심하게 된다. 내가 오늘 들은 사소한 내용 하나가 내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르고, 내가 뱉은 말 하나가 다른 이의 인생을 얼마나 바꾸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여러 자극 중에서 좋은 경험과 생각을 내 무의식 속에 잘 넣어두고, 또한 다른 이에게는 잘 분별하여 선사하는 것, 그것이 정말 어른스러운 일 아닐까. -p.85-86, 나만의 어른다움‘학’-어른스러움을 향한 소박한 연구

철든다는 게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같은 맥락에서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p.159, 20190114

또 저녁만 되면 꼭 어디가 조금은 아파서(플라시보인 것 같다) 기숙사에 일찍 들어가는데, L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나 없는 학교는 의미가 없다는데, 너무 좋잖아 그거. 그 말 들으려고 자꾸 몸이 아픈지도 모르겠다. -p.174, 20190215

정시. 정시란? 얼마나 매력적이길래 다들 정시라는 길을 택할까. 아니면 택할 수밖에 없는 걸까. 12년 동안 공부한 학생들에게 하루 만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험만 남겨진 것은 누구 탓일까. 자기의 모든 노력을 1년에 단 하루뿐인 그날에 걸어야 하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평균은 평균이 아닌 나라다. 전체 인구의 80퍼센트는 19살에 이미 인서울 실패라는, 자존감에 타격을 입고서 인생을 시작하는 셈이 아닐까. -p.177, 20190222


 

댓글4

  • BlogIcon Sibnt 2019.10.02 22:58 신고

    여기에 쓰진 않았지만, 떠오르는 기억들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풋풋했던 어린 시절의 나. 그때의 마음.
    답글

  • BlogIcon Sibnt 2019.10.02 23:07 신고

    한 사람을 보증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이 사람을 믿어, 라는 보증이 계속될 수 있다면 좋겠다. 더 나은 방향으로는 변하되, 추락하지 않기를.
    답글

  • BlogIcon Sibnt 2019.10.02 23:09 신고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부분도 늘 고민이다.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 이것저것 마음이 걸려서 결국 가리고 가리는 글을 쓰다가 쓰기를 그만둘 때도 많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답글

    • moon 2019.10.02 23:34

      글을 쓴다는 것은 용기라는 것이 필요하단 것을 느끼지. 사람의 시선에 대한 용기보다 나 자신에게서 자유할 수 있는 용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