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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책

《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by Sibnt 2019.08.29

《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에 대한 리뷰를 읽으면서 김소연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먼저 읽어보길 추천받아서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시인이 쓴 산문집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읽었던 산문집 모두 좋았기에 이번에도 기대하며 책을 들었다.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기록했다는 글.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으며 내가 경험했던 일들도 같이 떠올라, 중간중간 메모하며 읽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들도 글로 적으려니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았고, 구체적이지 않으니 생생하게 적는 것이 어려웠다.

기록을 잘 남기려면 경험하는 것들을 그냥 넘기지 않는 시선과 경험을 순간순간 메모하는 성실함이 같이 필요한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습관화해서,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 책 속 밑줄

선생님은 내 얘기를 더 들으려 하지 않으셨다. 다만 "말리지 않을래요. 그냥 하고 싶은 거 있음 해요. 대신 엉망이 되면 옆에 있어는 줄게요"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눈은 나를 정면으로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해주는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하고 계시다는 게 눈빛으로 전달이 되었다. 그 눈빛은 내게 내내 선물이 되었다. 잘할 것 같은 자신감이 아니라 잘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든함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했고 다행히 엉망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옆에 있어줄 필요도 없었다. -p.19-21, 그런 어른

그러나 용기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전하는 칭찬은 소용스럽지 못하다. 위로하기 위한 칭찬임을 그들이 나보다 먼저 알아채고 다른 종류의 낙담을 한다. 자신을 냉정하게 알아채고 있는 사람일수록 진짜 칭찬과 진짜 위로와 진짜 교감을 더 잘 알아본다. -p.33, 고마움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도중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덜덜 떨며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인간이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의 사랑할 만한 점은, 인간이 건너감이고 몰락이라는 데 있다. 나는 오로지 몰락하는 자로서만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저편으로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47, 인간의 사랑할 만한 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내 옷을 산 것도 아닌데 할머니의 결정에 내 기분이 좋아졌다. 시원한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내 무릎이 다 사뿐해졌다. 그 할머니가 친구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이 기뻤다. 멋쟁이들은 혼자서 옷을 사러 다닌다고 들었다. 충고가 필요없어서다. 충고는 모험을 가로막고 안이한 선택을 강요하는 경향을 띤다. 충고에 의해 우리는 멋쟁이가 될 기회를 자주 놓쳤다. -p.66, 멋쟁이가 되는 길

사랑을 표현하고 요구하는 방식에 우리들은 짐작보다 훨씬 더 서툰 것임이 분명했다.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몰라서 대화가 안 되는 게 아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서로 잘 알면서도 정작 다른 무언가가 더 중요해서 대화가 잘 될 수 없는 사이가, 이 세상엔 어쩌면 더 많을 것 같았다. -p.112, 사람 구경

"그런 일은 건성으로 해야 돼." 내가 고민을 말하자 마자, 함께 차를 마시던 선배가 한 말이었다. … 선배가 "건성으로 해도 돼"라고 말해준 것이 아니었다. 안 그러는 게 더 좋지만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선배는 "건성으로 해야 돼"라고 말했다. 나는 "해야 돼"라는 말의 단호한 어감이 좋았다. 그것은 성실함의 반대말인 '건성'을 지지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p.113, 최초의 경험

그녀는 대화 중에 함께 했던 지난 이야기를 미담처럼 다시 꺼내지 않는다. 추억을 재생하는 레퍼토리를 즐기지 않는다. 서로 익히 아는 오래된 상처를 꺼내어 내밀한 관계임을 새삼 확인하지도 않는다. 대신, 다음 달에 무얼 할지, 내년에 무얼 할지, 새롭게 꾸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그녀는 책임지던 것들을 계속 책임지며 살고 있고, 새로이 책임지고 싶은 것들을 언급한다. 책임지는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들을 무심하게 꺼내놓는 게 전부다. 그녀의 대화법은 그렇게나 암울했던 그녀가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던 비결 중 하나였다. -p.135-136, 그녀의 비결

독자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적혀 있는 시집을 찾아 헤맨다. 꼭 듣고 싶은 한마디가 시에 적혀 있기를 바란다. 이 시대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사랑한다는 말도, 희망이 있다는 말도, 인간을 믿어보자는 말도,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도 뻔히 거짓말인 줄 다 아는 시대다. 어쩌면 뻔한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고려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시가 다시 읽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사람을 믿어보겠다며 다른 방식으로 고백해보고 싶어서 시집을 선물하게 되는 건 아닐까. -p.173, 시집을 선물하는 시대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았을 때와 다름없는 종류의 노력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지만 있기는 하다. 이 드문 사람은 유리한 사람들이 갇히게 될 무지를 포함하여, 자신의 무지를 가장 두려워한다. 배우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당대에 드리운 무지의 그늘이 안타까워서 그 그늘을 밝히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늘 속에 있다. 이 시대가 영웅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p.189, 유리함과 무지함

기억하던 습성이 한 가지 방향으로 나를 왜곡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기억술은 그토록 항진력을 지니는 몹쓸 속성이 있었다. 한번 시작된 왜곡을 멈추는 힘을 글을 쓰는 일에서 얻는다. 몹쓸 한가지 방향에서 자연스럽게 곁가지들이 생겨나고, 생각해오던 습성 바깥으로 생각이 뻗어나가게 된다. 가까스로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건사할 힘을 얻게 된다. -p.258, 먹먹하고 막막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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