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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책

김애란 소설집,《침이 고인다》

by Sibnt 2019. 2. 28.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비행운》이라는 소설집으로 처음 접했다. 《침이 고인다》는 김애란 작가의 책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산 책이다. 단편들을 읽고 나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씁쓸한듯한 느낌이 남았다.

나는 각 단편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며 기억들을 읽었다. 반지하에 물이 차오르던 정신없는 상황, 후배와 함께 살면서 좋았던 마음과 좋지 않았던 마음, 성탄절에 방이 없어 겪었던 어떤 서러움, 독서실에서의 삶, 취준생의 마음, 어머니의 칼에 대한 기억 등. 단편마다 그 감정에 잠시 머무르는 느낌이 들었다. 단편이 끝나면 또 다음 단편을 쉼 없이 읽었는데, 조금 여유롭게 감정을 느끼며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단편 중에는 「칼자국」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칼 이야기를 하며, 어머니와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내가 경험한 게 아닌데도 가슴이 저몄다. "어머니는 내게 질문받는 걸 좋아했다.(p.173)" 이렇게 짧은 한 줄의 문장에도 나는 한참 머물며 엄마에게 질문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엄마의 표정, 밝기, 온도 등이 흘러와 마음을 울렸다.

김애란 작가의 글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그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것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가의 힘인 걸까. 아니면 비슷한 경험이 내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어서 감정이입이 잘되는 것일까. 어쨌든 작품들을 읽으며 김애란 작가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생겼다. 아마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도 나는 푹 빠질 것이다.

 

* 책 속 밑줄

어쩌면 유통기한이 정해진 안전한 우정이 그녀를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몰랐다. 하루란 누구라도 누구를 좋아할 수 있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근사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p.57

엄마는 없었어요. 가슴이 아팠지만 목 놓아 울 수 없었어요. 만일 제가 도서관에서 운다면 그건 아마 세상에서 제일 큰 울음이 될 테니까요. -p.60

후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사라진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말이에요. 껌 반쪽을 강요당한 그녀가 힘없이 대꾸했다. 응.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면 말이에요. 응. 후배가 한없이 투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p.61

그녀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 좋은 순간은 뭔가 같이 '먹을 때'라는 걸 깨달았다. 밥상 앞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보통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그 상이 그냥 상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밥상처럼 느껴졌다. -p.66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모범 답안 작성자는 자기소개서를 잘 쓴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 -p.121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 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 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 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p.158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상황은 자신이 만들고 결정은 어머니가 하게 하는. 하여, 칼 잘 쓰는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못 자르는 게 있으니 그것은 단 하나 부부의 연(緣)이다. -p.162

어머니는 내게 질문받는 걸 좋아했다. -p.173

하루에도 수천만 명이 수천만 개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데. 어째서 이 사람의 '미안하다'와 저 사람의 '괜찮다'는 부딪치지 않고 온전히 상대방의 단말기로 미끄러져갈 수 있는 걸까. -p.184

언니의 얼굴은 어른을 대하는 예의와 낭패감, 미소, 수치심이 섞여 형태를 갖추지 못한 반죽처럼 흔들렸다. -p.190

신림동 고시 인구가 2만 명 정도 된다던데. 여기를 지나간 이들 모두가 일제히 숨죽이며 살았겠구나. 2만 명의 침묵, 2만 명의 뒤꿈치, 2만 명의 불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p.203

누군가의 얼굴에 한 시절이 고일 때 그 사람은 잠시 다른 사람이 되지요.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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